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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 奉化琴氏的由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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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09-8-24 15:21:22 | 显示全部楼层 |阅读模式
本人是奉化琴氏的第31代长孙女,为了让大家更了解韩国文化贴出我们本家姓的由来。帮助大家学习韩语哦
봉화(奉化) 금(琴)씨의 유래 [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금씨는 고대(古代) 기자(箕子)와 함께 들어온 금 응(琴應)이 문장과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후손으로 고려개국공신에 오른 금 용식(琴容式)을 시조로 하고 있다.[align=justify][align=justify]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후손이 명확하지 못해 고려 명종과 고종 때에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진 영열공(英烈公) 금 의(琴儀)를 1세조(중시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왔다.[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금(琴)은 동양의 옛 악기다....... 거문고나 가야금, 어느 것이나 선비가 성정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희애의 정서를 펴는 수양과 도야의 그릇이다. 우리나라 249개 성씨 가운데 악기 이름을 성으로 택한 것은 봉화 금씨뿐이다. 수양과 도야의 그릇을 표방한 성씨답게 수는 많지 않아도 학문과 도덕의 기품을 면면히 이어온 가문이다. 전국에 약 2만여명, 성별 인구순의 79위, 희성을 넘어 귀성에 든다. 경북봉화를 중심으로 안동, 영주, 영양, 흥해 등 일대에 집단거주해 지역에선 토반으로 꼽혔다. 본관은 봉화 단일본. 문헌에는 김포(계양), 강화 등 몇 몇 본이 전하나 모두가 봉화의 분파이거나 거주지역의 표시로 본다. 봉화의 옛이름을 따 봉성금씨로도 일컬어오다 현재는 봉화금씨로 통일해 쓰고 있다..........” (83년 중아일보 게재)[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영열공(英烈公)  금 의(琴 儀)[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금 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 강종이 즉위함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할 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의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거늘 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 왕이 금 의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했다. 금 의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금나라 사신은 ‘황제의 출입이 정문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하고 답했다, 이 말을 받아 금 의가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 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 (고려사 기록)[align=justify][align=justify]“ 70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 물러나기를 빌거늘, 벽상공신(벽에 이름을 기록하는 공신)을 가하고 물러나게 했는데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 즐기다가 고종 17년에 돌아가니 78세라, 왕이 부음을 듣고 슬픔이 심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례를 하고 영렬(英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열부)[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금 의의 비문은 백운 이규보가 지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바둑이야기는 우리나라 국기사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돼 있다.[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금의[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생들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기체가로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을 보면 당시 금학사(琴學士)라 불리웠던 영열공 금의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align=justify]□ 조선시대의 금문(琴門)[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조선초 금문은 한차례 시련을 겪게 되는데, 다름아닌 제2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일문이 화를 입게 된다. 영열공 금의의 후손인 금인배는 딸을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방간(회안대군)에게 시집 보내 이성계와 사돈간이 된다. 그러나 새 왕조가 열린지 10년도 안돼 권력을 놓고 왕자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소동이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데, 금문의 사위인 방간은 방원과 맞섰다가 패배, 귀양가고 그와 함께 처족인 금문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조선조에서 금문의 이름을 높인 인물은 세조 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금휘, 청백리로 대사성에 오른 금유, 그리고 금난수, 금응내, 금보, 금응훈, 금천, 금제순, 금서, 금앙성, 금응석, 금응상 등 퇴계문하의 일단의 학자들이다. 특히 금휘는 세종 때 문무양과에 급제하였고, 세조와는 주석에서 주고받은 시가 유명하다. 전라감사를 지낸 금유는 김종직과 시작교류를 가져 김종직 문집에는 그의 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퇴계 이황과 금문의 인연[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조선중엽, 금문과 퇴계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퇴계의 맏며느리가 바로 금문의 딸.[align=justify][align=justify]당시 금문은 봉화, 안동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가문인데 비해 퇴계의 6대 선대는 아전에 불과해서 금문의 완고한 노인들은 퇴계집안과의 혼사를 반대해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한 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문이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문의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문장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기게 된다.[align=justify][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그 중에도 성재(惺齋) 금난수와 매헌(梅軒) 금보는 퇴계가 매우 아꼈던 제자로서 매헌 금보는 특출한 필체로 스승이 돌아간 후 비문을 직접 썼다.[align=justify][align=justify]일세를 풍미했던 대학자 퇴계는 “ 기고봉(대승)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 수 없고, 금매헌이 아니면 글씨를 쓸 사람이 없다”고 유언했다.[align=justify][align=justify]그 외 한말 금석주는 일제침략에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1896년 인근유림들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align=justify][align=jus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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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justify][align=justify]□ 고산정(孤山亭)과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align=justify][align=justify]금문의 인물가운데는 벼슬을 했다가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는 가풍을 지켜온 사람이 많다. 성재 금난수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퇴계의 제자로 1561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잠시 지내다 낙향,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봉양을 위해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로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동계서원(東溪書院)에 제향되었다.[align=justify][align=justify]성재 금난수는 월천(月川) 조목의 매부이기도 했는데, 월천 조목 역시 퇴계의 큰 제자로서 밑으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가르쳤다.[align=justify][align=justify]성재 금난수는 1563년,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별경’인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어 독서를 하며 자연과 벗하였다. 고산정은 일명 ‘일동정사(日洞精捨)라 불리는데 성재의 아들인 금각(琴恪)의 ’일동록‘에 고산정 건립의 기록이 전해져 온다.[align=justify][align=justify]고산정 주위의 풍광을 읊은 선현들의 시문집인 <고산지(孤山志)>라는 책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고 그 서문만이 남아있다. 서문은 소무헌(素無軒) 금서술(琴書述)이 썼다.[align=justify] [align=justify][align=justify]                        ---- 작성 및 편집자 : 봉화금씨 서울경기청장년회 금 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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